감정 노동 예방하는 합리적인 민원 응대 절차

성난 고객 상대하는 CS 고객 센터 상담원 만큼 힘든 직업도 드물 것이다. 기본 예의 조차 지키지 않는 몰상식한 불량 고객은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한다. 하지만 이들이 힘든 이유가 단지 진상 고객이 많아서 만은 아니라고 본다. 때로는 상담사가 지극히 합리적인 고객을 진상으로 오해해서 불필요한 감정 노동을 자초하기도 한다.


고객 대부분은 '문제' 상황에 직면했을 때 고객 센터에 전화를 건다. 상담원의 역할은 고객의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상담원은 고객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해 주는 사람이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상담원은 문제 해결에 집중해야 한다. 문제 해결이 핵심이고 친철은 거들 뿐.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문제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적절한 해결책 제시도 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 고객 센터의 합리적인 고객 응대 절차는 대략 다음과 같아야 할 것이다.

1. 고객이 문제라고 주장하는 상황을 경청한다.

2. 해결 가능 여부를 판단하기 전에, 고객이 설명하는 상황이 정말 '해결해야 할 문제'인지를 먼저 파악한다.

3. 고객이 제기한 문제가 정말 해결할 문제가 맞다면, 이를 어떻게든 해결하겠다는 적극적인 자세로 임한다.
3-1. 문제를 당장 해결할 수 있는지 아니면 지금으로서는 마땅한 해결책이 없는 지를 파악한다.
3-2. 적절한 해결 방안이 있다면 해결책을 제시하고 상담을 끝낸다.
3-3. 당장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면 가능한 융통성을 발휘하여 임기응변으로라도 대처할 방안을 강구한다.
3-4. 그래도 도저히 방법이 없다면, 안타깝지만 지금으로서는 해결 방법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한 뒤 정중히 사과한다. 그리고 비록 당장은 어렵더라도 차후라도 제품이나 내부 정책 등이 개선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한다.
3-4-1. 고객이 사과와 다짐 정도로 만족한다면 고객에게 다시 한 번 정중히 사과하고 상담을 종료한다. (이후 정말로 약속이 지켜지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고객의 신뢰를 곱절로 회복할 수 있다.)
3-4-2. 고객이 사과와 다짐 이외의 별도 보상 따위를 요구한다면, 조치 권한이 있는 상위 담당자에게 상담 건을 이관한다.

4. 고객이 주장하는 문제가 해결할 문제 상황이 아니라 단지 고객의 무리한 요구인 경우 이에 대해 차분히 설명을 한다.
4-1. 고객이 상담원의 설명에 수긍하면 상담을 종료한다.
4-2. 고객이 계속 무리한 요구를 한다면 블랙 컨슈머로 간주하여 이들에게 정면으로(?) 대응할 권한이 있는 상위 담당자 또는 블랙 컨슈머를 전문적으로 응대하는 팀에 상담 건을 이관한다.

민원 상담 업무에 공감 능력이 필수적이라는 점에 이견이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공감 능력이라는 말만 봐서는 감정적 능력 같지만 실은 이성적 사고에 기반한다. 공감의 시작은 역지사지인데, 감정에만 충실하면 분쟁 상황에서 자기 감정을 누르고 타인 입장을 추론하기 어렵다. 자기 자신의 감정은 세상 그 무엇보다 명징하고 절박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고객 상담 업무에 필요한 공감 능력은 민원인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영혼 없는 미사여구 가득한 하이톤의 과잉 친절이나 비굴함 따위는 진정한 공감과는 거리가 멀다. 

상담원이 감정 노동을 최소화하려면 합리적 사고를 토대로 합리적인 고객과 진상 고객을 명확히 분별해야 한다. 그러자면 우선 민원인이 주장하는 문제가 정말 문제인지 아닌지를 명확히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고객이 제기하는 문제 상황이 충분히 합리적이라면, 설사 그 문제를 지금 정해진 규정 여건 상에서 당장 해결하기 어렵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도를 적극 알아봐야 한다. 그래도 어렵다면 적어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진심으로 안타까워라도 해야 한다.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규정이 없는 상황은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가 정말 심각한 것이다!

그런데 많은 상담원이 고객의 문제가 정말 문제인지를 판단하기 전에 당장 해결할 수 있는지 아닌지를 먼저 판단한다. 그리고 해결할 수 없는 경우 이를 해결할 문제로 인식하지 않고 그저 무리한 요구로 간주하며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하려는 상담원은 부실한 내부 규정과 되도 않는 어설픈 대책만 앵무새처럼 반복하여 언급한다. 이런 말을 계속 듣다보면 상담원이 제 아무리 친절하게 말을 해도 민원인은 짜증날 수 밖에.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이 쌓이면 고객은 문제가 발생할 때 일단 진상부터 부리고 보게 된다. 어차피 아무리 합리적으로 말해봐야 안될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큰 소리를 쳐야 뭐라도 얻어낼 가능성이 높으니까. 

물론 방어적인 상담 태도를 상담원 개인 잘못으로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현실적으로 위와 같이 합리적인 상담 서비스 제공할 여건이 제공되지 않고, 오직 최대한 많은 콜 수를 처리하도록 종용한다.

어찌되었던, 이러한 경우 앞서 말했듯 정당한 문제를 제기한 고객은 졸지에 비합리적인 진상 취급을 받게 되는 샘. 이러한 상황에서는 상담원이 아무리 친절한 말투로 응대해도 민원인은 화가 날 수 밖에 없다.

특히 공무원이 이러는 경우가 많다. 지들 규정이 무슨 헌법이라도 되는 줄 안다. 문제 상황이 규정 밖에 있는 경우 절대 문제로 인식하지 않는다. 규정에 대한 의심이나 개선 의지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사람의 노화와 조직의 관료화는 비슷하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지식과 경험이 쌓이지만, 호기심은 줄어들어 자기가 알고 보고 느끼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착각한다. 조직도 성장할 수록 체계가 규정 관례 같은 체계가 잡히지만 틀 밖의 문제는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곤 한다.

문제 해결에 가장 방해가 되는 사고 방식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아예 문제가 아니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주어진 상황을 몇 가지 조건에 대입해보고, 조건에 맞는 경우가 없으면 에러 메시지를 벹는 일은 기계가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한다. 인간이 인간 다우려면 인간다운 사고를 해야 한다.

그런데 인간적인 사고는 고사하고, 민원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끼어드는 경우도 있다. 평소 지인과의 대화에서도 상대방이 중간에 말 끊으면 짜증나는데, 이미 짜증이 나서 고객 센터에 전화를 한 고객 입장에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말이 빠른 사람도 상담 업무에 적합하지 않다. 이런 사람은 평소 상대방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자기 말을 하는 경우가 많고, 그렇지 않더라도 듣는 이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하기 어렵다.

아재와 달리 아줌마는 고객과 접점에 배치되는 경우가 많은데, 단순 계산 또는 호객 행위 이상의 복잡한 상담이나 질의 따위의 대화가 발생하는 창구에 전업 주부 느낌의 전형적인 아줌마를 배치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고객이 같은 아줌마인 경우라면 그나마 괜찮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경우 서비스 품질과 브랜드 이미지 나락 가기 십상.

흔히 고객 센터 상담원을 감정 노동자라고 한다. 감정 노동은 말 그대로 고역이다. 따라서 이성의 영역에서 합리적으로 풀 수 있는 문제는 굳이 감정 노동 영역으로 가져가지 말아야 한다. 고객 상담을 되도록 감성이 아닌 이성으로 처리할 수 있는 정책과 절차와 훈련이 필요하다. 이러한 절차와 노력을 갖춘 이후에도 불가피한 감성 노동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고된 감성 노동을 견딜 수 있는 전문 담당자를 따로 배치해야 한다. 물론 이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니까 민원 응대자의 감정 노동 문제의 근본 원인은 메뉴얼 자체도 부실한데 메뉴얼을 벋어난 상황이 발생할 때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권한 없는 현장 말단 직원이 욕받이 될 수 밖에 없는 구조. 결과적으로 거대 관료 조직이 힘 없는 일개 상담 직원 등 뒤에 숨어 민원인에게 갑질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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