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악한 한국 IT 업계 현실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려면

정부 발주 사업으로 먹고 사는 소프트웨어 외주 개발 업체의 핵심 역량은 기업 대표의 영업 능력이다. 기업 대표가 정부 부처 실무자와 얼마나 친한가에 따라 수주 실적이 달라진다.

흔히 '정부 발주 사업은 결국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말이 있는데 일정 부분 사실이다. 꼭 무슨 비리가 있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민간 기업에서 공무원이 해야 할 일을 대신 맡아서 한다고 해석하면 보다 정확하다.

그럼 무슨 일을 대신 하느냐? 민간 기업이 공무원을 대신하여 RFP 작성을 한다. 민간 기업이 공무원 대신에 정부 사업 아이디어를 내고 사업 발주를 위한 제안 요청서를 작성한다는 뜻이다. 공무원이 RFP 작성을 부탁하는 경지가 되면 정부 사업 영업맨으로서 나름 정점에 오른 샘이다.

실무 담당 공무원이라고 아이디어가 무한정 샘솟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공무원이 갖추기 힘든 전문 지식을 요구하는 사업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 SI 기업 영업맨이 공무원과 친해지면, 공무원은 그 사람에게 RFP 작성을 요청한다. RFP는 이를 작성한 기업이 사업을 수주하기 유리하도록 작성될 것이 당연하다.

위와 같은 상황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비난할 것도 아니라고 본다. 어차피 누군가 사업을 위한 아이디어를 내야 하고 또한 그 사업을 맡아서 진행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간 기업이 전문성을 발휘하여 공무원을 대신하여 사업을 준비하는 것은 어찌보면 정당한 로비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사업을 수주한 기업이 실제로 그 프로젝트를 맡아서 개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업을 수주하고 나면 실제 프로젝트 개발은 하청을 주는 것이다. 뭐 여기까지도 정당한 기업간 거래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프로젝트 하청 단가가 원래 사업 금액에 비해 턱없이 낮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A기업이 정부로 부터 10억에 사업을 수주했다면, A기업은 B기업에게 3억 정도에 프로젝트를 하청한다. 그래서 실제로 B기업이 개발을 하면 그나마 다행인데, B기업은 또 다시 C 기업에 8천만원 정도에 재하청을 한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한국 SI 업계의 악명 높은 갑을병정무기경신 시스템.

물론 A기업이 10억 짜리 프로젝트를 3억 원에 충분히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프로젝트 관리를 잘 해 준다면야 이 또한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보통은 하청이 거듭될 수록 프로젝트 관리는 엉망으로 꼬이고 실제 개발사와 개발자는 착취를 당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로젝트의 개발 품질이 좋을 리가 만무하다.

솔직히 말해서, 한국의 열악한 IT 업계 현실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열악한 한국 IT 업계의 현실은 사실상 소수 재벌의 독과점 체제인 대한민국 경제 구조에서 기인하는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규모있는 사업을 발주할 수 있는 주체가 정부와 재벌로 한정되어 있는 상황 자체를 바꾸지 못한다면, 지금의 IT 업계 여건은 크게 개선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제시할 수 있는 그나마 근본적인 대책은 20억 이하 정부 발주 프로젝트의 경우 하도급을 완전히 금지하는 것이라고 본다. 필요할 경우 정부 사업 기획을 별도 프로젝트로 간주하여 민간에게 맡기고, RFP를 작성한 기업은 프로젝트 입찰에 참여할 수 없도록 하는 것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정부 사업 발굴을 위한 대국민 아이디어 공모 체널을 열어두는 것도 방법이다.

이미 2006년 경에 정부가 10억 이하 정부 발주 프로젝트는 대기업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하지만 호랑이 없는 굴엔 여우가 왕이라고 대기업 참여 금지시키니 그 자리를 중소 로비스트들이 매꿔서 결국 개발사와 개발자의 열악한 현실은 별로 나아진게 없다.

대기업 참여 제한은 병의 뿌리를 뽑는 근본적인 처방이라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상처에 연고만 바르는 격. 역시 대기업 참여 제한보다 더욱 근본적인 대책은 하도급 금지. 중소규모 프로젝트의 하청을 금지하면, 적어도 자체 기술력이 없는 중소 로비스트가 IT 프로젝트 수주하여 원청 가격의 2~30%로 후려쳐서 개발사 섭외하는 일은 막을 수 있다. 하도급이 금지 된다면, 20억 이하 프로젝트의 경우 대기업은 줘도 안 먹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하청 금지나 대기업 참여 금지 같은 규제는 정부의 인위적인 시장 개입이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인위적인 시장 개입은 되도록 하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꼭 해야 한다면 최소 개입으로 최대의 정책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보다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어설픈 규제는 자칫 선량한 시장 참여자들만 지치게 만들 수 있다.

하도급을 금지해도 기존 영업 에이전시들은 어떻게든 꼼수를 써서 기득권(?)을 유지하려 들 것이다. 서류 상으로만 어느 개발사에 소속된 것 처럼 꾸미거나 아니면 개발사와 컨소시엄을 맺고 실질적인 거래 조건은 기존의 하도급 형식으로 하던가. 이런 꼼수는 하도급 금지와 더불어, 영업 인력에 대한 급여나 대가는 프로젝트 금액의 30%를 넘어서는 안된다던지, 컨소시엄에 참여하는 각 기업의 대가 분담의 편중 비율을 제한한다던지 하는 추가 조항을 붙이면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로비스트가 개발자 없는 개발사를 차리고 개발 인력을 외부에서 파견 받아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도 있다. 이것도 꼼수라면 꼼수지만 이것 까지 막기는 좀 어려울 듯. 원래 정부 규제만으로 시장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그래도 이 경우는, 어찌되었건 로비스트가 프로젝트 개발까지 직접 관리하는 상황이므로, 로비스트 입장에서는 하도급에 비해 리스크가 훨씬 크다. 따라서 개발자의 처우에도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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