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은 확고하게 껍질은 유연하게

벤처 업계에서 일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종종 듣는 말 중에 하나가 '내 스타일은 이러이러 하다.' 이다. 아무래도 벤처 기업을 운영하거나 벤처 팀에 속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 비해 개성이 뚜렷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 역시 호불호가 매우 뚜렷한 편이다. 사람들이 종종 나를 너무 까칠한 사람으로 인식해서 부담스러울 정도로. 하지만 나는 '이게 내 스타일이야.',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같은 말을 잘 하지 않으며 이런 말을 듣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이 말 자체를 싫어하는건 아니고, 무슨 말이든 항상 오용 또는 남용되는 것이 문제. 이런 말이 듣기 싫은 이유는 이런 말이 보통 자신의 쓸데 없는 고집을 꺾지 않고 바람직한 변화를 거부하거나, 고집 자체를 합리화 또는 정당화하기 위해 쓰이기 때문. 차라리 "나는 이것 '밖에' 안되는 사람이야"라고 말한다면 그건 아쉬운대로 OK.

자기 스타일이 명확한 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과유불급이라는 말처럼 뭐든 지나칠 때 문제가 된다. 아무리 값진 경험이라 할 지라도 그것이 상황에 맞게 적절히 변화하거나 발전할 수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좋은 경험이 아닌 편견이다. 지금까지 잘 해 왔던 방식이라고 해서 앞으로도 잘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벤처 업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의 연령대가 대부분 20~30대라는 것을 생각할 때, 평균 수명 120세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아직 지켜야 할 것 보다는 배워야 할 것이 더 많다.

특히 벤처 기업은 여러 상황에 맞게 그 때 그 때 유연하게 대처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변화를 거부하고 지금의 자기 방식만을 고수한다면 그것은 벤처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값진 성장의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는 격. 자기 스타일을 강력히 고수한다는 것은, 설령 스스로 그러한 의도가 없다 할 지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스타일을 남에게 은연 중에 강요하는 격이 되기도 한다. 지나친 방어는 때로는 공격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가치관의 중심은 쉽게 바뀔 수 없고 바뀌어도 곤란하다. 하지만 그것을 둘러싼 껍질의 형태는 상황에 맞게 바꿀 수 있다. 가치관이 명확할 수록 성향이나 스타일은 오히려 유연하게 가져갈 수 있다. 유연한 것과 줏대 없이 이리 저리 흔들리는 것은 다르다. 유연함은 바람직하지만 줏대 없이 흔들리는 것은 위험하다. 중심(가치관)이 확고한 것과 껍질(고집)이 단단한 것도 다르다. 중심이 확고하면 매사 유연하고 합리적이고 자신있게 대처할 수 있지만, 껍질이 단단하면 껍질 안의 것에 지나치게 민감해지고 자칫 껍질 밖의 세상을 오해하게 된다.

물론 껍질이 단단하다는 것은 그 중심에 어떤 소중한 것을 품었다는 증거일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중심의 것이 아직 미숙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껍질을 열면 자칫 자기 안의 소중한 것이 허물어져 버릴까 두려운 것이다. 가치관의 중심이 정말 명확하고 확고하다면 오히려 그것을 둘러싼 나머지 성향은 더욱 유연하게 가져갈 수 있다. 중심에 자신이 있는 만큼 그것을 둘러싼 껍질이나 방어벽을 더 쉽게 치울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경영자의 경우 사업적 비전(중심)과 자신의 성향(껍질)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업적 비전을 둘러싼 자신의 고집마저도 사업적 비전으로 착각하여 스스로 제품과 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리고, 주변 사람들이 떠나게 만들며, 결국에는 본래의 귀한 비전마저 퇴색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 (나도 그랬다..) 껍질이 단단하면 나와 다른 사람과 소통하여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데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벤처 업계의 유명한 격언 중 하나는 바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인 팀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엑스파일의 멀더와 스컬리,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송강호) 형사와 서태윤(김상경) 형사, 슬램덩크의 북산 팀 처럼, 시너지는 서로 다른 능력과 성향을 가진 사람이 모였을 때 발생한다.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 모여서 서로 마음이 편한 것과 진정한 시너지를 내는 것은 다르다.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면 (그것이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기존의 가치가 증폭되거나 가속될 수는 있어도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서로 다른 사람끼리 단지 모여있기만 하면 그저 싸우기만 할 뿐. 각자 다르면서도 또한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원활한 소통을 통하여 서로의 장점을 배우고 단점을 보완할 수 있어야 진정한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다.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받으며 각자가 성숙할 수 있는 실력과 인격과 의지가 필요하다. 스타트업 기업과 그 구성원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해야 함은 물론이고 궁극적으로는 진화를 거듭해야 한다. 하지만 진화는 커녕 변화와 성장도 어려운 것이 인지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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